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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뚱냥이/인문, 사회, 문화, 종교

(2024 #23) 하나님의 열심 | 박영선 지음

by 뚱냥아빠 2024.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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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 과연 이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

내가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그 믿음... 조차도 하나님께서 섭리와 택하심과 은혜가 없었음면 우리에게 그 믿음이 생길 수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택하심,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이끌고 계시기에

지금은 정말 개차반 같은 삶을 살고 있더라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그 믿음의 조상의 모습까지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신앙 서적 중에서도 손에 꼽고 싶은 책이다.

꼭 많은 사람들이 읽어 보면 좋겠다.


p33

단언하건대, 우리가 모범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은 불신앙에서 출발한 아브라함이라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믿는 이 구원이 은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수준에서 출발했지만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거기까지 인도하시고 강권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목덜미를 끌고 가나안까지 들어가신 셈입니다.

 

p37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시는 작업, 곧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리킵니다. 신자는 누구든 하나님 앞에 설득당한 사람입니다. 그 과정에서 맨 나중에 설득되는 것이 '이해'입니다. 하나님은 맨 먼저 우리의 운명부터 설득하시고 다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이해를 설득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에게 설득되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해하고 인정하고 공감하기 전에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었다는 사실로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끈질기게 설득하셔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출발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p4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분명히 약속하셨는데도 아브라함은 하갈에게서 자식을 얻었던 것입니다. 약속을 받았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하여 이 약속의 성취를 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점을 하나님이 꾸짖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재와 침묵으로 꾸짖으십니다.

 

p54

믿음은 하나님의 설득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돌보시고 깨우치셔서 아브라함이 설독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설복되는 것이 은혜이며 아브라함은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p82

그런데 믿고 결단하고 울며 회개하는 이런 경험이 구원의 조건이나 원인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구원의 결과로 일어난 현상이며 구원을 받았기에 생겨난 변화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울면서 회개한 것은 거듭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거듭났기 때문입니까?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이미 거듭나고 구원 얻은 자만이 죄를 깨달아 회개할 수 있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죄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스스로 알 수 없는 눈 먼 자이자, 구원의 필요성도 깨닫지 못하는 시체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라는 체험은 구원받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거듭난 신자에게만 일어나는 경험입니다. 우리가 자주 혼동하는 대목이 바로 여기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조건을 충족하여 얻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것입니다.

 

p83

구원 얻을 만한 조건이 우리 안에서 발견되지 않을수록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만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84

전에는 앞을 볼 수 없던 자가 이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 얻은 우리가 아는 것도 딱 하나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을몰랐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p85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여러 권능을 행했다고 자신을 증명하려 들겠지만,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겉모습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으로 신자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얻은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큼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기 전에 우리 생각과 삶이 하나님과 얼마나 많이 연결되어 있는지 먼저 살펴보십시오. 평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p110

구원은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셔서 완성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이미 완성하신 구원이지만, 여전히 세상에 있는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 실수하고 실패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수와 실패로, 하나님이 이미 이루셨고 마침내 이루실 이 일이 방해받지는 않습니다.

 

p136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곧바로 젖과 꿀을 맛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자 보호자이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나안에서 해야 하는 것은 전쟁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 곧 성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종종 오해하는 대목입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바로 이런 싸움을 해야 했음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아 영적 자손을 얻었음에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평탄한 삶이 아니라 아들 이삭을 바쳐야 했던 전쟁 같은 갈등이었던 것입니다.

 

p150

성경이 야곱을 들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셨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놓아두지 않고 간섭해서 길렀다는 것입닏. 야곱이 에서보다 나은 자라서 하나님이 택했는가 하는 질문에 성경은 관심이 없습니다. 택함받은 자 야곱이 자기 인행을 홀로 책임지도록 하나님은 방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곱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에 그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펼쳐집니다. 이것이 '택하심'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인생은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살려는 그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그의 생애를 목적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에 따라 야곱을 인도하고자 하시지만 야곱은 계속 거부하여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야곱의 불순종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야곱의 신앙 여정 내내 계속됩니다. 이것이 야곱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에서애게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습니다. 그는 택함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p159

성경이 말하는 '교만'은 흔히 생각하듯 잘난 체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 없다. 나는 나 홀로 충분하다"라는 생각이 바로 교만인 것입니다.

 

p180

하나님은 야곱이 하란에 도피하러 갔다 올 것 없이 바로 그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야곱이 가나안 땅을 얻는 그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그 땅을 소유할 수준의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란에서의 삶을 겪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p184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가운데 그저 묵묵히 인도받아야 마땅합니다. 올 한 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준비하시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 하나, 그는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뿐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로 답 없는 현실을 견디게 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결국 나에게 복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말씀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신자의 인생은 이를 얼마큼 아느냐의 싸움입니다.

 

p227

"모든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 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나다" 이는 야곱이 바르게 잘 살았기 때문에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렸기 때문에 나온 고백도 아닙니다. 역경과 고통의 시간을 거치며 이르게 된 고백입니다.

 

p229

파란만장한 삶을 지나 이제 말년에 다다른 야곱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그래도 나는 야곱보다는 낫지'라고 하는 안도감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곱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칠 수 있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라면 왜 나라고 그렇게 외칠 수 없겠는가' 하는 담대함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런 존재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p260

아직 우리는 요셉이 앉은 총리의 자리에 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쯤 걷고 있을까요? 각자 다를 것입니다.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낙타 꼬리에 묶인 채 터벅터벅 걷는 중인지, 보디발의 집에서 고되게 종노릇하는 처지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 상황인지, 혹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상황인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지금 평안하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조금 후에 옥에 갇히는 억울한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기가 어디쯤 서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촐리 자리에 앚아 있는 요셉과만 견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p306

하나님이 눕혀 주실 때 서고 싶고, 하나님이 세우실 때 눕고 싶으면 힘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워 주실 때 서고, 눕혀 주실 때 누우면 그것처럼 복된 인생이 없습니다. 만사형통이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괄시받으라고 내몰면 괄시받으면 됩니다. 이보다 쉬운 일은 없습니다. 그걸 피하려고 도망 다니니 어려운 것입니다. 자존심이 꺽여야 하는 일이라면 꺽이면 그만입니다. 자존심을 내세우려고 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p322

구원이 값없이 주어진 은혜라는 사실은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많습니다. 구원의 조건을 자기가 충족하려 하거나 구원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본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도 제사를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는 제사를 드렸으니 구원은 받겠지'하며 안심하려 들 뿐, 제사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p326

다윗은 자기가 잠깐 한눈판 결과로 죄를지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실수로 죄짓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원래 죄밖에 지을 수 없는 존재여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p346

거듭난 자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거듭난 자가 아니면 보아도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신비는 우리 힘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복음 전도는 선포에 그쳐야 합니다. 논쟁을 벌이지 마십시오. 다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습니다.

 

p381

"주님, 제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게 진심이 있고 또 최선을 다했지만 제가 이를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p385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요구하는 모습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너의 최선을 다해라, 네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일의 운명이 결정되지는 않지만 너의 최선을 통하여 내가 일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베드로가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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