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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뚱냥이/인문, 사회, 문화, 종교

(2024 #2) 팔복 | 전성민 지음

by 뚱냥아빠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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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밴큐버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 원장이자 세계관 및 구약학 교수인 전성민 목사님의 팔복 강해? 설교 책이다.

팔복에 대한 내용들을 하나 하나 뜻어보면서 현대인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이 팔복이 어떠한 의미인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꾹꾹 눌러 쓴 책이라 할 수 있다.

 

세계관이라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관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세계관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점차 변화하게 된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점차 바뀌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신앙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 산상수훈.. 그 중에서도 팔복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관점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 말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교통해야 할 지에 대하여 제시하고 있는 본문이 바로 이 팔복일 것이다.

 

그 팔복에 대하여 하나 하나 그 의미에 대하여 잘근 잘근 파헤쳐 본 책이 바로 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고, 꼭 한번 읽어 보아야 할 책이라 할 수 있겠다.

 


p30

성경을 읽을수록 나의 생각이 변화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통해 나의 생각이 강화된다면, 그래서 더욱 고집스러워진다면, 그것은 무첫 안타깝고 아쉽고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성경을 다시 읽는 것은 성경을 읽으며 내 고집을 버리는 일입니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을("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의 새로운 설명 앞에("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바로 겸손과 안전입니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우리는 아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먼저 나는 말씀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못 알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비난받지 않고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곳을 만들어야 합니다.

 

p35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낯선 질문을 던지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의 신앙을 믿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저의 적용입니다.

 

p48

"하나님이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라는 식으로 팔복을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 위해 내가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적용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5:3을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식으로 적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복됩니다!"라고 외치는 것은 어떤 특정한 행동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변화를 요청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라!'보다 '이렇게 이해하라!', '이렇게 생각하라!', '이것을 인정하라!'는 함의를 지닌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으라고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라는 선언을 받아들이라고, 사고방식과 세계관의 변화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p93

하나님 외에는 대책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는 것이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복입니다.

 

p120

배가 고프도록 먹지 못하고 목이 마르도록 마시지 못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결핍이듯, 정의가 없는 것은 제자들이 경험하는 가장 실존적이고 근원적인 결핍입니다.

 

p140

'배고픈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어떤 행위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깨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행위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 즉 기독교의 진짜 정체성을 지키는 행위다.' 제사가 신앙을 지키는 것 같지만, 사실 신앙을 지키는 하나님의 방식은 자비입니다.

 

p150

하나님의 자비가 불편한 이유는 세리를 우리와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할 때 하나님의 자비는 끝없는 불편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자비가 불편해지만, 결국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리고 제사로 자비를 대신하려 합니다.

 

p191

깨끗한 마음은 나뉘지 않은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아픔 가운데 있는 이웃과 함께하며, 하나님의 백성이자 예수님의 제자로 한결같은 삶을 자신의 온 존재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엉터리 같은 세상에서 살다 보니, 마음을 정결케 한 것이, 한결같은 신앙을 가진 것이, 손해 보면서까지 신앙의 도를 지킨 것이 허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 한결같이 신실히 사는 것이 헛되다고 느껴지는 시절을 경험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한결같은 삶을 지켜내야 합니다. 너무나 고약한 역설이지만 그래야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214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을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고난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어야 하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능력을 보이신 때가 아니라 십자가에 그대로 머물러 돌아가셨을 때였습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1:20이 말한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신 방식이었습니다. 평화는 편앙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걸은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이제 그 길을 걷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희생을 감내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p223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와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가 추구하고 만들어야 할 평화의 지평을 보여 줍니다. 평화는 우리 내면의 문제로 그치지 않습니다. 평화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이상의 차원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로 끝나지 않습니다. 평화는 세상과 함께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함께하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알아봅니다.

 

p239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누리는 특별한 혜택이 있기는 할까요? 있다면 도대체 무엇일까요? 신약성경이 알려 주는 참된 복이 팔복이라면, 구약 성경이 알려 주는 참된 복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복을 받게 하는 복, 복의 근원이 되는 복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선하심을 믿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과 '약속의 선물을 다시 내어 놓는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부르심이자 고유한 복입니다. 그 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그런 온전한 사랑을 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관계와 그 관계에 신실하기 위해 겪는 어려움이 그리스도인을 진정 특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기뻐하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이유며 구원의 본질입니다.

 

p250

정의는 종교와 세상을 거스릅니다. 종교와 세상은 정의가 거슬립니다. 자신들의 위선과 욕망을 정의가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해합니다. 그런데 이 박해의 경험은 복이 됩니다. 우리를 더 복된 자리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더 영이 가난한 사람, 더 애통하는 사람, 더 온유한 사람, 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더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천국을 가진 자로 더 자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세상에 복을 주는 복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이유요 정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이 복 있는 이유입니다.

 

p261

비방과 박해, 모함과 비난을 당하면서도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어려움이 우리의 신앙이 진짜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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