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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뚱냥이/인문, 사회, 문화, 종교

(2023 #92) 삶의 영성 | 헨리 나우웬 지음, 윤종석 옮김

by 뚱냥아빠 2023.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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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영성

세계적인 영성 스승 헨리 나우웬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리 일상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소개한다. 현대인을 위한 ‘영성 훈련’의 핵심을 압축해 담은 헨리 나우웬의 일상의

www.aladin.co.kr

아주 얇은 책이다.

마음 먹고 읽으면 앉아서 한두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양이다.

 

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참 깊이가 깊다.

그래서 글은 길지 않지만, 한줄 한줄 곱씹고 생각해보며 읽어야 한다.

이게 바로 이 책의 묘미이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삶이 크리스천으로 맞는 삶일까?

이 삶이란 것을 뗄 수 없는데,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것에 대하여 나름의 답을 주고 있는 책이다.

 

사실 답이랄 거 까진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하나님과 독백을 하는 단 둘이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 안에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으로 내가 충만히 채워지면 공동체로 나가나는 것이다.

그곳에서 내가 싫은 사람, 불편한 사람, 용서해야 하는 사람들과 부딛치며 그러한 경험들이 쌓여져 가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사명으로 나가가게 되는 것이다.

그 사명이 바로 나의 삶의 자리인 것이다.

 

짧지만 참으로 강렬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꼭 한번 읽어 보길 바란다.


p22

영적 삶이란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삶이다. 예수님의 삶도 그 영이 인도하셨다. 셩령은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삶을 주신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성령을 만나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을까?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워낙 잡다한 일이 많고, 우리의 주목을 끌려는 소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반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런 공간을 내드릴 수 있을까? 지금 우리 삶속에 성령이 우리의 주목을 끄실 만한 공간이 있는가?

 

p23

우리 삶은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힘써야 할 활동도 많다. 우리는 빈틈없이 바쁜 삶을 원한다. 바쁘게 살면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느낀다.

몸이 바쁘지 않으면 생각이라도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이나 아직 있지도 않은 일로 온갖 염려를 다한다.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일에 대한 근심과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내면의 공간을 잔뜩 채운다.

근심과 죄책감의 이면에는 빈 공간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빈 공간을 낸다면 뭔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저일 것만 같다. 전혀 새로운 일이 벌어져서 내가 원하지 않은 곳으로 나를 데려갈 것만 같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영적 삶의 훈련이 중요해진다.

 

p24

영적 삶에서 훈련이란 "하나님이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을 내려는 노력"을 뜻한다. 훈련이란 자기 삶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지 못 하게 막는 일이다.

 

p29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순서는 거꾸로다. 우선 고독속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게 먼저다. 다음은 사람들과의 교제, 즉 사명을 함께 실천할 공동체와 더불어 거하는 것이다. 끝으로 그 공동체가 나가서 치유하고 기쁜 소식을 전파한다.

 

p35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구하는 마음은 결코 우리에게서 멀지 않다. 그것이 채워질 때마다 우리는 기쁨과 평안을 경험하고, 그것이 꺾일 때마다 우리는 아픔과, 종종 내적 고뇌를 경험한다. 우리는 소속감과 소통과 편안한 마음과 안전을 원하는데, 그중 어느 것도 우리 혼자서는 채울 수 없는 갈망이다. 우리의 전 존재는 다른 지성적 존재를 갈망한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p41

우리도 하나님과 단둘이 있어야 한다. 고독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 우리를 "내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그 고독 속에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과 나도 그분처럼 사랑받는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그 동일한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려온다.

기도란 그 음성을 내 존재의 중심으로 듣고 내 삶 전체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사랑받는 존재다.'

존재의 가장 진실한 심연에서 그 음성을 붙들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속으로 당당히 들어갈 수 없다.

 

p42

세상에는 다른 음성들도 많이 있어서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친다. "네가 사랑받는 자라는 걸 증명해 보라. 너의 가치와 쓸모를 입증하라. 뭔가를 보여주라. 유명해지거나 약간의 권력이라도 얻으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사랑할 것이고, 네가 훌륭하고 대단하다고 말해줄 것이다."

이런 음성들은 애무 위력적이다. 우리의 은밀한 정서 불안을 건드리며, 아주 바쁜 삶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관심을 받을 만한 착한 사람임을 세상에 입증하려고 한다. "세속적인 삶"이란 다른 게 아니라 이렇게 "주변의 반응에 좌우되는 삶이다." 때로 우리는 바쁜 삶을 소명의 표출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쑤님은 자아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우리의 시도가 유혹이란 걸 아신다.

예수님이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라는 음성을 들으신 직후에 그분께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사랑받는 자임을 증명해보라. 뭔가 보여주라. 이 돌을 빵이 되게 하라. 유명해지라.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네 명성이 자자해질 것이다. 권력을 잡으라. 그러면 진짜 영향력이 생길 것이다. 너는 영향력을 원하지 않느냐? 그래서 세상세 온 게 아니냐?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입증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사랑받는 자다."

 

p49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도하도록 부름받았다. 기도란 마음이 내켜서 하거나 큰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기도란 우리를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듣는다"라는 말은 라틴어로 "아우디레"다. 온전히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든는 걸 "옵 아우디레"라고 하는데, 거기서 "순종"이라는 말이 나왔다. 예수님은 순종하신 분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셨다.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그 닫혀 있는 정도만큼 귀도 막힌다. 귀머거리를 라틴어로 "수르두스"라고 하며, 귀먹은 정도가 심해지면 사람이 "어리석어진다" 어리석은 삶이란 더 이상 듣지 않는 삶, 귀가 얇아져 늘 온갖 음성에 휘둘리는 삶, 자신이 사랑받는 자라는 진리를 잃어버린 삶이다.

 

p52

영적으로 귀가 먹어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지 못 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사랑받는 자가 되려고 엉뚱한 데를 기웃거린다. 그리고 그때부터 문제에 빠진다. 사랑과 인정과 칭찬을 얻지도 못 할 곳에서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술, 마약, 관계, 성공, 남들의 평가, 통제 욕구 등 아무것에나 정신이 팔린다.

이 세상을 진정 자유롭게 살려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진리를 명확히 들어야 한다. 물론 우리의 정체성은 사랑받는 자다. 그 진리를 듣는 일이 바로 기도다. 기도가 어쩌다 한 번씩 하는 좋은 일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일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기도란 본질적인 마음가짐이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그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도로 사랑을 받을 것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그 풍성한 사랑으로 나도 베풀고 싶기 때문이다.

 

p53

바로 여기가 사역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근거는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주장하는 데 있다. 사랑받는 존재로 살면 세상 속에 들어가 사람들을 만져주고, 치유해주고, 함께 대화할 수 있다. 또한 그들에게도 그들 자신이 사랑받고 선택받고 축복받은 존재임을 인식시켜줄 수 있다.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깨달은 사람은 남들 역시 사랑받는 존재임을 안다. 그리고 타인의 그 정체성을 불러내준다.

 

p60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할 때, 바로 거기서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라는 소명을 발견한다. 놀랍게도 고독은 언제나 우리를 공동체로 부른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 가족의 일원이라는 걸 깨닫는다. 더불어 살고 싶은 게 우리의 마음이다.

 

p73

서로의 은사를 기뻐한다는 건, 상대의 인간성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p80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사역으로 부름받았다. 사역이란 일차적으로 우리가 행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다. 비록 많은 일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사역이란 우리가 믿어야 하는 무엇이다.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안다면,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은사를 기뻐한다면, 거기서 사역이 나올 수밖에 없다. ~ 중략 ~ 

예수님이 원하신 일은 딱 하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었다. ~ 중략 ~

사역이란 바로 그것을 빋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려라면 우리에게서 능력이 나와 사람들이 치유될 것이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p85

가장 깊은 의미에서 감사란, 삶을 고마운 선물로 받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나아가 복음이 말하는 감사는 삶의 전부를 품는다. 좋은 일과 궃은일, 즐거운 일과 괴로운 일, 거룩한 일과 별로 거룩하지 못한 일까지 다 품는다. 기억하고 싶은 좋은 일만이 아니라 내 삶의 전부를 감사로 품는 것이다.

 

p93

서로의 연약함을 품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새 출발을 경험할 것이다. 함께 아파하는 긍휼은 인간의 커다란 모험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모험에 나서서 인간의 무서운 외로움에 과감히 함께 부딛쳐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삶이 모습을 드러낸다.

 

p100

당신과 나의 삶에서 중요한 건 성공이 아니라 열매다. 삶의 열매는 흔히 우리의 고통과 상실과 연약함 속에서 싹튼다. 우리의 땅을 쟁기로 갈아엎어야만 비로소 삶의 열매가 맺힌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문제는 "남은 인생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다. "내 삶에 풍성한 열매가 맺힐 수 있도록 어떻게 나를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드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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